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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0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원수들, 사랑 이야기> [4]
2008/09/23 마르틴 발저, <불안의 꽃> 2008/09/18 로제 그르니에, <이별 잦은 시절> 2008/09/17 앙드레 브르통, <나자> ![]() 1 읽은 지는 좀 됐지만, 뚜렷한 이미지를 남기는 소설들이 있다. 오늘, 노벨문학상이 르 클레지오에게 주어졌던데, 예전에 읽었던 그의 저서 <조서>에 대한 기억은 서걱서걱하기만 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다시 읽어봐야 한다는 말. 이 책 <원수들, 사랑 이야기>를 처음 집어들었을 때, 저자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사실만큼이나 그 이름도 생소했다. 허나,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는 차치하고, 그 소설을 읽으며 내가 멋대로 꾸며놓은 무대장치(배경)의 기억은 오래 남는 법이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막스 프리쉬의 "몬타우크",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 알랭 마방쿠의 "콩고", 루이스 세풀베다의 "아마존", 존 스타인벡의 "몬터레이", 아이리스 머독의 "런던" 등등 . . . 다녀온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되는 건 바로 그 무대장치들 때문이다. 이러한 장소들에 굳이 여행갈 거 같지는 않다. 비교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 어느 지역 부르주아 실내장식까지 소설을 통해 뇌리에 박아놓은 내가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내가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마니아라 할 만한 비교의 악취미도 없으니 . . .) 2 그나저나 이 소설은 전후 미국 뉴욕 브룩클린 이야기다. 주인공 헤르만은 독일의 유대인 사냥을 피해 3년간 건초다락에 숨어지내면서 목숨을 부지했다. 그 목숨을 구해준 자기집 하녀 야드비가와 뉴욕에 도착한 헤르만. 왠걸, 수용소에서 죽은 줄 알았던 그의 부인 타마라는 살아 있었고, 그것도 모르고 자신과 대화가 안 통하는 야드비가를 두고 마샤라는 팜므 파탈과 외도중이었으니, 죽을 뻔하다 살아난 헤르만이 뉴욕에 당도했을 때 그의 주변에 이미 여자 3명이 있었다. 운명이다. 나치를 피해 3년간 은둔한 생활 때문도 그렇겠지만 타고난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3명의 여자 사이에서 헤르만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아뿔싸. 웃지 못할 비극과 희극 사이. 3 "이 작품은 결코 일반적인 난민들의 삶과 그들의 고단한 일상을 다룬 것이 아님을 일찌감치 밝혀 둬야겠다. . . . 등장인물들은 나치의 피해자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격과 운명의 피해자들이기도 하다." (본문, 저자의 말에서) 나치즘으로 인한 피해의식에 쩔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운명이겠거니 체념하는 듯하면서도, 생겨먹은 대로 살아본다. 그게 편치도 않고 주어진 상황을 호전시키지도 않는다. 그래도 웃음이 스며나온다. 내가 유대인이 아니라도 웃을 수 밖에 없는 비극, 울 수 밖에 없는 희극. 이 정도면 보편성을 획득하고도 남지 않을까? 그에게 노벨문학상이 주어졌다면 그 때문일거다. p. s.> 그나저나 존 스타인벡의 <달콤한 목요일>은 언제 읽을까나? 정말 달콤한 목요일에 읽고 싶구만 . . . 2008년 9월 14-15일에, 읽다. ![]() 1 이제는 책을 집으면 머리가 아닌 눈이 먼저 말을 한다. 소설에 나오는 말 그대로, "눈이란 그 정도로 무능한 것이다. 눈이 하는 일은 착각에 빠지는 것 말고는 없다." (본문 542쪽) 그러나, '내 참, 오늘 이 놈 붙들고 날밤 새겠군.' 이라고 내 눈이 말했으니, 착각에 빠져도 좋다. 그러나 이렇게 황홀한 착각일 줄이야 누가 기대했을까? 제대로 된 소설 한 권이, 제대로 된 남자 한 명을 만난 것 마냥 진을 다 빼놓는구나. 2 예전에 <어느 비평가의 죽음>을 읽다 말았는데, 다시 읽어야되나 . . . 동일작가의 다른 저서, 이 책 <불안의 꽃>을 읽으며, 이 작가, 그 때 내가 읽다만 전작, 그 답답한 강박의 결을 제대로 도려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빛나는 80대이지 않을까? 3 70대 노인양반들의 이야기가 어쩜 이리 흥미진진하단 말인가? 내용도, 문장도, 문체도, 호흡도 모두 글래머러스하다. 그 G l m o u r o u s. 몸은 물론, 머리에도 달라붙지 않는 생경한 외국어들 속에서 드디어 그 단어에 접속되는 나만의 예문을 찾아냈네. 그러나, 명작을 대한 나의 반응은 천박할 따름이다. 오, 오, 오, 대박이야. 그만큼 할 말을 잃고 아연해지며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폴 스미스 Paul Smith의 엽서집을 뒤적거리다, 바로 저거다 싶었다. 마르틴 발저에게는 저렇게 팔목의 핏대가 선명해질 만큼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려 주는게 맞아.) 4 늘 궁금했었다. 그렇게 힘들게 올려놓은 돌덩이 아무렇지도 않게 굴러떨어질 때면 그 때마다 그걸 주우러 가는 시시포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는지. 이 소설 중반에 이를 때면 주인공 카를의 내리막길이 뻔히 보인다. 그 내리막길 잔인하게 즈려 밟는 마르틴 발저의 현란한 문장과 플롯은 물론, 70대 노인이 그게 인간조건이라는 거, 그게 비극이라는, 그 시시포스의 '인식'(굴레가 아닌 인식)을 내게 몸소 보여주시는데, 그게 구태의연한 신화라든지, 망령 든 노인네 넋두리라는 망발은 내 입에서 감히 나오지 않았다. 하물며 이 소설에서는 자본주의든, 예술이든, 종교든, 사회주의든, "For one's sake", 그 잇셀프. 모더니티의 핵심을 구현하는 캐릭터들로만 일관한다. 5 홀로 따져보건대 일상은 믿지 말지언정 현실은 직시하자는 말. 제길, 마지막 문장도 훌륭하잖아. 저 몹쓸 노인네. "어차피 흘러가 버려야 할 물이 자신의 운명에 헛되이 저항한다면 그 얼마나 하찮은 종말이 되겠소." (본문 662쪽) 읽은 사람으로서 추천해야 마땅한 소설. 그러나 그 취향의 강요만큼 독설이 어디 있겠는가. p.s.> 지니야, 수고했어. 훌륭해. 몇몇 오타가 좀 눈에 밟히지만, 9월 22-23일에, 읽다. ![]() 1 10편의 단편소설. 전철 타고 오가며 한편씩 읽으면 딱일 듯한데 전철 탈 일이 없어 한자리에서 또 내리 읽다. 미셸 투르니에, 장 그르니에, 로제 그르니에 등등. 김화영씨가 번역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서양인들 보면 인종 구분이 안 되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 이 양반들 이름은 뒤죽박죽이다. 고 놈이 고 놈인 듯한. 기억이 맞다면, 첫번째 읽는 로제 그르니에의 단편집. 2 요즘 갈수록 작가 혹은 책 주변을 맴도는 지식인 나부랭이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인용이라 불리는, 다시 말해 남의 입을 빌어서 많은 이야기를 해버리곤 하는데, 그 취지는 알겠으나 영 마뜩치 않다. 돈키호테나 천일야화는 꿈도 못 꾸는 문화의 불모성이 아쉬운 게다. 3 "끝난거야?" 절벽처럼 뚝뚝 가차없이 마무리되는 꽁트들이 오히려 긴 여운을 남긴다. 자잘한 일상의 환멸을 담아내는 상황포착이 압권이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시는지 등장인물 중 암소젖 짜기의 달인더러, '젖 짜기의 빌헬름 켐프나 알프레드 브렌델 같은 사람' 이라고 묘사한다. 기대치 못했던 짭짤한 재미들. 아주 유쾌하였다. 단편이라면, 이 정도의 이야기는, 이 정도의 유머는 예의가 아닐까? "우리가 같이 겪어온 그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눈물 몇 방울 흘릴 가치는 있잖아!" (본문 129쪽) 아무리 비루한 삶이라도 그렇단다. 그래, 눈물 몇 방울 정도는 똑똑 흘려줘야 그게 그간 살아온 삶에 대한 예의일테다. 9월 16일에, 읽다. ![]()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 <나자 Nadja>(1928), 오생근 역, 민음사, 178쪽, 2008 1 운동 혹은 이즘(-ism)으로서의 초현실주의가 거론될 때면 언제나 언급됐던 그 소설, 고전(canon) <나자 Nadja>. 설마 번역이 될까,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원어로 한번쯤 짚어야 되지 않을까, 그런 건방진 생각을 했었다. 초현실주의가 언어로 번역될 수 있을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마니페스토같은 강령이 아닌 이상에야, 초현실주의의 기본인 말장난(언어유희)이 우리말이 아닌 이상에야, <나자>의 번역은 언제나 먼 일인 것만 같았다. 2 ![]() Andre Breton (1896-1966, 사진출처; 본문 152쪽) 이렇게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초현실주의를 주도한 사람이라니, 차라리 주어진 대로 의사의 길을 걷지, 쯧쯧 (하긴 의사로 이렇게 이름 남기기도 쉽지 않지만) 운동, 강령, 차치하고 <나자>는 정말 제대로 된 "연애소설"이다. 나의 부러움은 그가 전직 의사가 될 수 있었는데 그걸 포기하면서까지 예술 나부랭이를 주도했다는 점에 있는게 아니다. 30대 중반, 딱 그 나이에 아주 멋들어지게 연애소설을 썼다는 점이다. 3 초현실주의 이후 신난 건 프로이트, 라캉 어쩌고 저쩌고 하는 비평가들뿐이지, 정작 초현실주의가 보여준 건 무의식의 소실점이다. 그 소실점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건 정작 과거 없는 빈곤한 현대의 비평가들일지도 모른다. 하여 생각컨대, 운동으로 초현실주의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면 그 1번은 오브제/사진과 문학일테고 회화와 조각은 부차적이다. 말장난을 기본으로 한 초현실주의에서 회화는 밀릴 수 밖에 없다. 사진과 회화를 동반한 이 텍스트가 빛을 발할 수 밖에 없음을, 마지막 소설 속의 "내"가 말하길, (다분히 마지막 문장이 강령적이긴 해. 운동 컴플렉스마냥.)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본문 165쪽) p. s. > 움베르트 에코를 읽으면서 소설답지 않다고 투덜대던 거, 한 방에 해소했다. 아무리 허접한 연애 이야기라도 소설은, 최소한 이래야한다, 라고 내게 말해준 책. 브르통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 에누리를 바랄 필요 없는 그 문장들, 그러나 성립되는 '이야기' 요즘 소설가들이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까. 9월 11-13일에,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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