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된 호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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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드 치프킨, <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레오니드 치프킨 Leonid Tsypkin, <바덴바덴에서의 여름>(1977-80), 이장욱 역, 2006, 민음사

수잔 손택이 쓴 서문에는 작가 치프킨의 아들의 증언이 인용된다.
"아버지는 매일, 정확하게 7시 45분에 척추 질환 및
바이러스성 뇌염 연구소로 출근했다. . .
그는 6시에 귀가해서 저녁을 먹고 짧은 잠을 잔 후에 글을 썼다.
글은 대개 소설이나 의학연구논문이었다. . .
내 아버지는 언제나 글쓰기를 열망했지만,
그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의사였던 '유대인' 치프킨(1926-88)은
수차례 미국으로의 망명을 시도하지만
모두 거부당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일생동안 해외출국을 한번도 허가받지 못했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고 있는 바덴바덴(Baden-Baden)은
로마시대부터 온천휴양지로 개발된 독일의 도시로,
1800년대 후반 유럽 최초로 건설된 카지노로 더욱 유명해졌다.

20세기 후반의 어느 겨울 레닌그라드 행 기차를 탄 주인공 나(치프킨)는
도스토예프스키(이후 그의 애칭이었던 '폐쟈'로 지칭함)의
두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일기를 펼쳐들고,
1867년 바덴바덴에서 시간을 보냈던 그들 부부의 여정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한다.
출국이 금지되었던 저자이자 화자인 내가
폐쟈의 서쪽(바덴바덴)으로의 여행과는 반대방향인
동쪽(레닌그라드)으로의 여행을 택함으로써,
의식적으로 19세기 후반과 현재인 20세기 후반을 연결하며,
(19세기 러시아에서의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의 대립이
20세기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작가의 인식은 소설 곳곳에서 발견된다)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는 폐쟈의 유대인 혐오증과 미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유대인' 치프킨의 기차여행 모티브는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룬다.

처음에는 레닌그라드로 지칭되고 있는 도시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페테르부르크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 또한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작가적 장치이다.
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 그 지명의 변천만큼
미묘한 러시아 역사의 결을 드러내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1914년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된 이 도시는,
1924년 레닌 사후 레닌그라드로,
그리고 다시 1991년에 페테르부르크로 개명된다.
러시아 미술, 특히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다루는 글들에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이 도시이름의
미묘한 뉘앙스를 강조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

수잔 손택의 표현대로 이 소설은 아름다운 소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화두로 과거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이 소설에서,
폐쟈와 안나의 애증으로 점철된 사랑과
카지노 코인더미에서 삼각형의 정점을 발견하려는
도박꾼 폐쟈의 이상주의적이자 무용한 시도들,
그리고 한때 문학의 신동으로 추앙받다가
쓸쓸히 투르게네프와 벨린스키, 그 모든 문학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폐쟈의 절망감과 무력함은
1960, 70년대 러시아에서 순전히 서랍에 쳐박기 위한
소설을 음성적으로 쓸 수 밖에 없었던
(그가 죽은지 20년만에 이 소설은 출판되었다),
또한 여전히 '유대인'이라는 꼬리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치프킨이라는 작가의 고통과 오버랩된다.
여기서 형상화된 폐쟈의 삶이 아무리 허구적일지라도
그것이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있는 근거는
사실과의 대조가 아니라,
치프킨의 섬세한 숨결과 호흡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나처럼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소설에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찾아보기 : "범소설 para-fiction"
다시 읽기 :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읽어보기 :  앙드레 지드의 <도스토예프스키>

20061024-6 읽음
by ukieo | 2006/10/28 08:14 | 캐비넷 - 양피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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