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된 호기심
by uki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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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완정, <가을날의 동화>
장완정, <가을날의 동화 秋天的童話>(1987), 주윤발, 중추훙 주연, 97mins

01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멜로영화가 존재할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긴 한데,
매일 한편씩 보면서 하루의 외로움을 달래도 될만큼
많지 않을까.

문화니 예술이니 이런것과 담쌓고 지내던 어린시절
틈틈이 보아둔 멜로영화의 고전들이 꽤 되는지라
새로 업데이트시킬 놈이 없을까, 인터넷을 전전하지만
대개는 시원찮은 녀석들 뿐이다.

02
당구장이 모임의 장소가 되었던, 아주 가끔은 노래방으로도 향했던,
대학시절 밤문화 기억의 한귀퉁이에는
뭐니뭐니해도 지금은 도태되고 만 비디오방에 대한 애틋함이 남아있다.

전부는 아니라해도 당시 본 영화들의 기억에는
적절한 취기가 서려있는 셈이다.
아마도 그날, 그 선배에 대한 호감이 전혀 없었더라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비디오방에 가지 않았겠지,
더불어 이 영화도 보지 못했을테고.
그러나 막상 편안한 소파에 몸을 기대니
졸음이 쏟아졌고 영화 보는 중간중간에
선배가 던지는 질문들에 안 자는척 기를 쓰며
대답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03
긴 서론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이 영화 덕분에
새로와진 비디오방에 대한 기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멜로영화의 도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이 영화의 줄거리에
특별히 언급할 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두 남녀(the would-be-lovers)가 연인이 되는 과정 그리기.
1996년도 과음한 어느날 비디오방에서 졸법한 밋밋한 이야기다.

그런데 다시 보니 장면들이 무척이나 훌륭하다.
색감이 풍성하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돋보이는 실내장면은 물론,
80년대 이민자들이 살아가는 뉴욕 뒷골목의 서걱한 거리장면까지.
슬라이드 영사기를 풀가동시켜 로모로 찍은 사진들을
관객의 눈앞에 툭툭 내던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멜로영화의 한계는 영화의 이미지를 검색하다보면 실감하게 되는 바,
왜 이리 스틸사진들 모조리 주인공 남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것들 일색인지.
그나마 안 그런 사진들을 겨우 찾아 올려보지만 마뜩치 않다. 

아마도 멜로영화에 대한 가장 끈질긴 오해 중 하나일 거 같은데,
두 사람의 얼굴에서 사랑의 기승전결을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말이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니나, 막상 지나간 사랑을 회고할 때(이 감독이 영화로 남긴 것처럼)
떠오르는 것은 주인공들의 얼굴이 아니라 함께 했던 기억의 배경들이다. 
햇살의 조도, 바람의 세기, 벽지의 색감과 시멘트 벽의 질감과 낙서, 칠 벗겨진 벤치, 나무, 
읽어보지 못한 책이 꽃혀있는 누군가의 책장, 거리에 나뒹구는 전단지와 행인들, 쇼윈도우의 반사상.
 
각자 나름의 방식이 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방법 혹은 기억의 시선이 머무는 소실점은
그러한 배경들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 영화, <가을날의 동화>였다.


蛇足 :  젊은 날의 주윤발보다 풍채가 있는 이후의 그가 더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나오듯 체크무늬 9부 양복바지는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법.
심지어는 담배를 꼬나문 당구장의 뭇청년들 사이로 단연 돋보이는 주윤발.
(이건 비단 외모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유행은 돌고 도는 것. 물론 아직 미디길이가 긴 청바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시의 에스닉풍 의상들은 20년만에 다시 등장하지 않았는가.
(처음 이 영화를 보던 시절은 다리가 길어보이는, 미디길이가 짧은 닉스가 유행하던 때였지)

2010년 01월 05일에, 보다.
by ukieo | 2010/01/07 12:30 | 캐비넷 - 몽타주 | 트랙백 | 덧글(1)
103년만의 폭설
1
라디오를 듣는데 사연 대부분이
어제의 폭설에 대한 일화다.
어제는 책상에 앉아 사진기로 창밖의 풍경을 담는데
띄엄띄엄 나타나는 사람의 모습이
그 자체로 테마가 되는 하루였다고나 할까.
굳이 손대지 않아도 저절로 풍경이 이지러지면서 Blurring
정신없이 흩날리는 눈발의 질감을 담아낸 흑백사진이 되었다. 
2
계절감을 느끼기에 하이쿠만한 것도 없다.
마츠오 바쇼오(松尾芭蕉,1644-1694)의 하이쿠 한 편 올린다.

원문이 함께 실리는 민음사 세계시인선, 참 맘에 든다.
옛날 남자친구하면 노란색이 떠오르는 이유도
아마 그가 선물해줬던 랭보시집의 속지색이 노란색이라 그런거같다.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던 때)

오늘은 햇살이, 눈녹는 소리가
경쾌한 빗소리처럼 창문에 내린다.
by ukieo | 2010/01/05 13:34 | 캐비넷 - 오늘 | 트랙백 | 덧글(0)
광화문 정경
유학다녀온 똘똘한 건축학도는 점점 많아지고 있을터인데
대통령 되신 시장의 선례를 역사로 급조하며
600년 고도의 역사를 가위질해대거나,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라는 허울 좋은 이름하에
가건물로 덕지덕지 도배해놓은 도심의 꼴이 안타까워,

내참, 툴툴거리는 것도 지쳐갈 무렵,

잠시 입다물고, 그나마
소복히 내리는 눈 풍경을 음미하니 좋았다.
오후 4시의 어스름과 흐린 날씨의 어스름은
이리도 섞이기 쉬운 한통속이었음을
시간을 잃은 인공조명은 멀뚱히 눈을 깜박인다.

눈먼 통계가 환영할 법한
광장 이용 인구의 급증과 함께
노점상들의 발빠른 점령이 시작되었다.

눈 내리는 오늘, 겸사겸사 새해인사 전한다.
모두들! 해피 뉴 이어!
by ukieo | 2009/12/27 21:00 | 캐비넷 - 오늘 | 트랙백 | 덧글(0)
c o c k s c o m b
생활에 꽃 한송이가 필요했다.

어제는 문득 이러한 생각에,
꽃 모양이 수탉의 볏과 같아 'cockscomb'이라 불리는
맨드라미(계관, 계두) 한 송이를 구입하다.
간만에 집안 깊숙이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현주와 박미와 맨드라미의 다홍색으로 물드는
추억을 곱씹다.

드디어 개시한 난방으로 집안에 훈훈한 공기가 감도니
조지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 들으며
시원한 프로즌 다이쿼리 한 잔 꺾으면 딱일 듯한데, 아쉽다.
아쉽다.

꽃말은 '열정'.
by ukieo | 2009/11/22 17:18 | 캐비넷 - 꽃집에서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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